교사의 말은 언뜻 듣기에는 합당했다. 일반인의 안전을 위해 자신들이 먼저 나가야 한다. 교사는 그렇게 주장했다. 교사를 상대하는 체이서는 이제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교사를 보았다. 한영은 그가 하진의 옆에서 자신을 두고 싸우던 체이서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선생님, 제가 몇 번을 말씀드려요. 습격의 휴식기간 동안 빠져나가는...
한영이 눈을 뜬 건 체감상 십오분 여가 지났을 시점이었다. 정말 꿀 같은 단잠이었다. 그는 자신이 누워있던 자리를 반쯤 감은 눈으로 살폈다. 엉성하게 모아 붙인 긴 벤치와 담요나 수건 따위를 황급히 덮은 모양새가 다급했던 심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온몸이 나른하고 따끈따끈한 느낌이라 기분이 좋았던 그는 다시 누워 뺨을 담요에 비볐다. 한영의 뺨과 담요...
왜 신경 써. 누구의 목소리도 아닌 말이 한영의 귓가를 스친다. 성인이 되면 가이드를 그만둘 계획이잖아. 다시 스치는 목소리. 한영은 구역질이 올라오는 걸 애써 억눌렀다. 맞아. 그만두기로 했잖아. 한영은 성운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만두면, 해결되는 건 맞아? 해결. 한영은 사금의 충고가 떠올랐다. 그만둘 수는 있어? 한영이 애써 무시하고 있던 사...
성운이 제5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대피소에 있던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영이 뒤이어 들어오자 노골적인 한숨을 내쉬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피소에는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학교 전체 인원이라고 생각하면 상당히 작은 수로 보였으나 제5 체육관이 큰 탓도 있다는 걸 감안해야했다. 주 선생은 학생들을 그나마 통솔하고 있던 교사들과 합류했다....
한영은 물 밀듯 밀려오는 거대하고 이유 모를 죄책감을 애써 떨치며 성운의 얼굴을 직시했다. 말간 얼굴은 한 치의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한영은 여전히 두려웠다. 원칙적으로 변이종과의 전투에 투입되는건 성인, 정식 군인 신분이 되고 난 이후다. 창밖은 여전히 짙게 넘실거리는 안개의 바다뿐이다. 한영이 두 손을 마주 잡아 힘을 준다. 핏줄이 돋아날 정도로 ...
진주희는 덜컥 겁이 났다. 박성운이 체이서, 거기다 S급치고는 얌전한 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머릿속으로 생각나는 모든 발현자 범죄가 스쳐 지나갔다. 사실상 체이서의 범죄 다수에 가이드가 엮여 있음을 그가 모르지 않았다. 진주희가 불안하게 시선을 돌렸으나 날이 선 감각에도 박성운의 기척은 잡히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하고 ...
성운은 자신의 뒤를 바짝 쫓는 학생무리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올라 헉헉거리면서도 그들은 절대 뒤처지고 싶지 않아 했다. 처음엔 성운이 한영과 함께 남아있으라고 권했으나 학생무리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도움도 안 되는 가이드 따위와 남아있고 싶지 않다는 눈빛. 성운은 그 눈빛을 읽어냈으면서도 별다른 말없이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들은 대피소로 이동하면서 사람이 숨었을 만한 곳을 찾아 모두 확인하기로 했다. 주 선생과 성운 사이에서 보호받으며 걸어가던 한영은 창밖의 풍경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그는 건물 안으로 조금씩 새어 들어오는 붉게 일렁이는 안개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높은 농도의 마력을 품은 붉은 안개는 파도가 치는 모양과 같이 일렁였다. 크게 밀려오고 다시 떠내려가는 안개의...
비발현자는 눈을 뜨기도 힘들 정도로 강렬한 빛이 세상을 불태웠다. 창밖의 세상은 뜨겁게 들끓는 바다 같았다. 희미한 비명 소리가 창틈으로 흘러들어왔다. 비명 소리는 너무 작아 거대한 바람에 흔들려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한율은 무심한 얼굴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태양을 집어삼킨 바다는 물이 넘쳐 올라 한율이 서 있는 층까지 수위를 ...
가족. 좋은 울림이었다. 가족이란 한영에게는 결핍의 대상이자 그리움의 대상이지 않았던가. 지금보다 더 어린 시절의 유한영은 그 단어에 속아 매일 밤 베개를 눈물로 적셨다. 한영은 자신이 가족이라는 말을 쓰는 일을 얼마나 어려워하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한율 역시 그 말을 꺼내기까지 상당한 마음을 소모했으리라 짐작했다. 한영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왕 ...
한영은 한율의 손길을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얼굴을 맡겼다. 한율의 손길은 부드럽고 상냥해서 한영은 그 손에 기댔다. 잠이 덜 깨서 그런지 눈이 감기는데 한율의 웃음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듯했다. “한영이 아직 잠 덜 깼구나. 무서운 꿈이라도 꿨니? 오랜만에 이렇게… 한영이가 피하지 않고 있어 줘서 기뻐.” 한율의 보라색이 욕망으로 물들었다. 그의 ...
“《제 5차 지상 전쟁》 역시 레오닐 10세와 똑같이 발현자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명령을 내려 인류를 위협하고 끝난다. 익히 알다시피 이 작전으로 깊숙한 곳에 파묻혀 있던 마핵이 드러나 손상이 가고 이로 인해 변이종이 나타나 인류는 경계를 만들어 변이종과의 전쟁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발현자는 마핵과 변이종에 노출되어 살아남...
글쓰고 그림그리고 헛소리하는 세이지입니다. 하고 싶은 걸 합니다. @Dr_S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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